내가 경험한 폐촉매 거래의 시작은 계약서도, 선박도 아니었다. 시작은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작은 샘플 하나였다.

베네수엘라의 정유공장 창고에는 이미 대량의 폐촉매가 보관돼 있었다. 그러나 수십 톤의 물량을 눈으로 확인했다고 바로 가격을 제시할 수는 없다. 폐촉매의 가치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금속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FIELD NOTES 1편
이 글은 폐촉매 거래의 표준 매뉴얼이 아니라, PDVSA 물량을 검토하며 실제로 거쳤던 샘플 수령·성분분석·견적·비딩의 흐름을 기록한 경험담입니다.

시작은 베네수엘라 정유공장

PDVSA 정유공장에서는 원료의 황과 불순물을 줄이는 여러 촉매를 사용한다. 촉매는 반응을 돕지만 영구적으로 쓸 수는 없다. 성능이 떨어지면 리액터를 정지하고 사용하던 촉매를 꺼낸 뒤 새 촉매로 교체한다.

교체주기는 공정, 촉매 종류와 운전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거래했던 현장에서는 대략 2~3년 주기로 이해했지만, 이를 모든 정유공장에 적용되는 고정 기준으로 볼 수는 없다. 리액터 밖으로 나온 촉매는 더 이상 생산공정에 사용하는 새 촉매가 아니라, 관리와 처리가 필요한 폐촉매(Spent Catalyst)가 된다.

원료가 상부에서 유입되고 여러 촉매층을 지나 정제유가 아래로 나오는 정유 리액터 구조
정유공정에서 일정 기간 사용한 촉매는 성능이 떨어지면 교체되고, 사용을 마친 촉매는 폐촉매로 관리됩니다.

왜 베네수엘라에서 바로 금속을 회수하지 않을까?

처음 접하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긴다. “금속이 들어 있는 자원이라면 현지에서 직접 회수하면 되지 않을까?”

정유공장의 핵심 업무는 원유를 정제해 석유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다. 사용한 촉매에서 니켈이나 몰리브덴을 다시 뽑는 일은 전용 처리설비와 기술, 환경관리와 후처리가 필요한 별도의 산업이다.

그래서 발생업체에는 적법하게 처리해야 할 폐기물이지만, 회수기술과 설비를 갖춘 전문업체에는 금속을 얻을 수 있는 원료가 된다. 이 두 성격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 폐촉매 거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대량 거래의 첫 단서는 왜 작은 샘플일까?

폐촉매가 들어 있는 드럼을 열어 봐도 니켈과 몰리브덴의 함량을 눈으로 읽을 수는 없다. 같은 종류처럼 보여도 사용된 공정과 운전 이력, 수분과 불순물에 따라 성분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전체 물량을 대표할 수 있는 샘플을 채취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작다’가 아니라 ‘대표한다’이다. 분석기가 아무리 정밀해도 샘플이 화물 일부의 특성만 담았다면 그 결과로 대량 물량 전체를 판단하기 어렵다. 어느 포장단위에서 어떻게 채취하고, 혼합하고, 줄여 나갔는지가 분석 결과의 출발점이 된다.

창고의 여러 폐촉매 드럼에서 대표 샘플을 채취해 한국의 분석실로 보내는 과정
수십 톤의 폐촉매 거래도 여러 지점에서 채취한 대표 샘플을 작은 용기에 담아 보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베네수엘라의 샘플이 한국으로 오다

현지에서 준비된 폐촉매 샘플이 한국으로 보내지면, 우리는 이를 전문 분석기관에 맡겼다. 당시 이용한 기관은 SGS였다.

SGS 공식 소개에 따르면 SGS는 검사·시험·검증·인증 서비스를 제공하며, 한국에서도 다양한 산업 분야의 실험실 네트워크를 운영한다. 현재 공식 디렉터리에는 부산 사하구 신산로29번길 50의 부산 실험실도 등재돼 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회사의 이름 자체보다, 거래 당사자들이 사전에 인정한 독립적인 제3자 데이터를 확보한다는 원칙이다.

왜 제3자 분석 결과가 중요할까?

판매자가 자체 분석한 숫자만 제시하거나 구매자만의 결과를 주장하면 상대방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채취한 샘플이 정말 전체를 대표하는가?”, “같은 분석법을 사용했는가?”, “이 수치를 가격 계산에 그대로 쓸 수 있는가?” 같은 질문이다.

그래서 계약에서는 샘플링 방식, 분석기관, 분석법, 기준이 되는 결과와 이견이 생겼을 때의 처리 방식을 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제3자 분석의 역할은 그럴듯한 인증마크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판매자와 구매자가 함께 참고할 공통의 숫자를 만드는 데 있다.

분석표에는 무엇이 나올까?

성분표에는 샘플과 분석 목적에 따라 여러 항목이 표시될 수 있다.

모든 폐촉매에 이 금속이 전부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촉매 종류와 사용 공정에 따라 확인해야 할 금속과 가치가 달라진다. 거래에서는 이 가운데 실제 회수 대상이 되는 금속의 함량과 가격 조정에 영향을 주는 수분 등을 살핀다.

분석 결과가 가격의 출발점이 된다

분석표가 나오면 폐촉매는 비로소 가격을 검토할 수 있는 물량이 된다. 당시 사용했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개념적인 산정 구조
금속 함유량 × 기준 금속가격 × 지급률 − 수분·회수·처리·물류 등 조정요소

LME 같은 국제 기준가격은 금속가치를 생각하는 출발점일 뿐이다. 예를 들어 니켈이 일정 비율 들어 있다고 해서 ‘LME 니켈 가격 × 니켈 함량’이 곧바로 매입가격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회수할 수 있는 비율, 처리비용, 수분, 운송비, 계약상 지급률과 가격 기준일이 함께 반영된다.

폐촉매 분석 결과에 금속 기준가격, 수분, 회수와 처리비, 물류와 계약조건을 반영해 입찰가격을 산정하는 과정
분석표의 금속 함량은 가격 계산의 시작입니다. 최종 견적에는 회수와 처리, 물류와 계약 조건이 함께 반영됩니다.

계산이 끝나면 견적과 비딩으로

분석결과와 당시의 금속가격을 바탕으로 구매 가능한 범위를 계산한 뒤 견적을 제출한다. 내가 경험한 거래에서는 여러 업체가 가격과 조건을 제시하는 비딩(Bidding), 즉 입찰이 중요한 과정이었다.

가격을 높게 쓰면 낙찰 가능성은 올라가지만 수익성이 사라질 수 있다. 반대로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쓰면 거래 기회를 얻기 어렵다. 분석표를 정확히 읽는 것과 함께 “이 가격에 매입해 운송하고 처리해도 사업성이 있는가?”를 판단해야 했다. 폐촉매 거래의 첫 실무적 의사결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됐다.

아직 화물은 창고에 있다

이번 편에서 움직인 것은 대량의 폐촉매가 아니었다.

  1. 리액터에서 폐촉매가 발생하고 창고에 보관됐다.
  2. 전체 물량을 대표할 샘플을 채취했다.
  3. 작은 샘플이 한국으로 왔다.
  4. 제3자 기관의 분석으로 금속 함량을 확인했다.
  5. 기준가격과 여러 조정요소로 견적을 계산했다.
  6. 비딩에 참가했다.

폐촉매는 여전히 베네수엘라 창고에 있었고, 샘플과 분석표, 견적서만 두 나라 사이를 오갔다. 하지만 이 단계가 끝나야 비로소 낙찰과 계약, 국가 간 이동 절차로 넘어갈 수 있었다.

ONE LINE TAKEAWAY
수십 톤의 폐촉매 국제거래도 시작은 손에 들 수 있을 만큼 작은 대표 샘플 하나와 그 성분을 보여주는 분석표였습니다.
NEXT IN SERIES
비딩에서 낙찰되면 끝일까? — 계약 이후 시작되는 바젤협약과 폐기물 국가 간 이동 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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